달콤쌉쌉한 놀이터♬ - 고모부 얘기.

고모부 얘기. :: 2010/05/29 18:09

1. 나는 친척들과 친하게 지내는 성격이 못된다.
낯 간지런 말을 잘하지 못하는 성격도 그렇고,
또 일부러 연락을 해대는 성격도 못된다.
그냥 명절이 되면 으레 만나는 사이-
정도인 거다.

2. 내 고향 울산에는 부모님의 형제라곤 고모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서울에 있거나,
부모님의 고향에 계시거나,
그나마 가까운 곳이 마산이다.
그렇다 보니 자주 만나고 같이 놀고 하는 사촌은 고모네 언니들, 오빠뿐이었다.
같이 놀았다기보다는 언니 오빠들이 나랑 놀아줬다는 게 맞겠다.
나이 차이가 젤 적은 게 여섯 살이니까.

그냥 나는 막내였다.
고모집, 우리집 통틀어 7년 만에 아기가 태어난 게 나였고,
그래서 난 두 집안의 막내였다.
언니들은 그저 내가 예뻐 업어주고 안아주고
심지어 똥귀저기도 손수 빨아주면서 그렇게 예뻐해 줬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언니들은 내가 아직도 애기 같은지,
만나면 용돈을 쥐여주겠다고 늘 실랑이가 벌어진다.

3. 고모부는 늘 남을 배려하는 분이셨다.
폐끼치는 일은 무조건 안하시려 하셨고,
자식들에게 평생 어깨한번 주물러봐라 라는 말도 안하셨다면 이해가 되려나-
고마운 일은 고맙다, 좋으면 좋다, 늘 표현하셨다.
울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너무 표현해서 탈이다고 할 정도로-

그래서일까.
고모부는 내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아버지의 모습이셨다.
자식들에게 한없이 다정다감하고,
이렇게 해라, 이게 맞다 훈계를 하시기보다는 늘 대화를 나누려 하셨고,
휴가철에는 가까운 바닷가에라도 자식들을 데리고 가 놀려 주셨다.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아빠를 가진 언니오빠가 난 늘 부러웠다.

4. 난 고모, 고모부가 좋았다.
그냥 좋았다.
부모님같은 마음으로 좋아했다는게 맞을것 같다.

5. 갑작스런 고모부의 암선고-
등뼈가 자꾸 아프다셔서 병원엘 갔더니, 쓸개에 염증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정도 치료를 하셨는데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어, 다른 큰 대학병원으로 갔다.
응급실로 들어갔는데, 거기 의사가 보자마자 첫마디가 암인것 같네요 였다.
그리고 정밀검사를 해보니, 쓸개암 4기 판정을 받았다.
일주일 사이에, 염증이 암으로 변했다.
그리고 수술은 무리라고 했다.
포기할 수 없어 서울에 있는 병원으로 오셔서 다시 검사를 했다.
수술이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검사결과, 역시나 수술은 어렵다고 했다.
진통제를 놔주는 정도밖에는 없다고..
병원엘 찾았더니 고모부는 황달로 온몸이, 눈동자 흰자위까지 노랬다.
고모부는 당신의 병을 모르셨다.
눈물도 참고, 밝게 웃으며 얘기를 해야만 했다.
고모부 덕에 회사도 땡땡이치고 왔다고~
울산에 내려가면 또 들리겠다는 얘기밖에 할 말이 없었다.
그땐 정말 말주변이 없는 내가 너무나 싫었다.
어떻게 할 말이 그렇게나 생각이 안날수가 있을까 싶었다.

고모부께서 함께 온 남자친구에게 말씀하셨다.
우리집 형제들이랑 고모집 형제들은 친형제들 처럼 형, 아우 하면서 사이좋게 잘 지낸다고,
남자친구보고도 형, 아우 하면서 잘 지내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할아버지가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는 직장암으로 돌아가셨는데, 아마 그때 내 나이가 많았어야 고작 다섯살이었을거다.
왜소한 체격에 까맣게 된 피부에, 기침을 하셨다.
정확한 기억은 없다. 그냥 문 뒤에 숨어서 몰래 할아버지를 봤던것.
할아버지가 날 불렀지만 도망을 갔던 것.
그리고 할아버지가 내게 고암을 치셨던 것.
그정도의 기억이 남아있다.
무서웠다. 그 흐릿한 기억의 할아버지는 무서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고모부를 뵈니 그때의 할아버지가 생각이 나 가슴이 찌릿찌릿 저려왔다.
슬펐다. 너무나-

6. 고모부는 울산으로 다시 내려가시고 계속 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쓸개에 염증이 너무 심해 부어서 척추를 누르고 있어 움직일때마다 아픈거라고,
그 염증을 빼려면 적어도 한달은 입원을 해야한다고,
사촌오빠는 고모부께 그렇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나는 어버이날이 낀 주말에 울산에 가려고했다.
어버이날 겸 고모부도 뵙고 하려고-
근데 그때 감기가 너무 심하게 걸려, 회사까지 나가지 못할정도로 아파 울산엘 가지 못했다.
그럼 석가탄신일이 낀 그 주에 가겠다고 했다.

15일 토요일.
도서전을 다녀와 사진을 정리하고 책을 정리하고 있는데, 새벽 2시좀 안되 언니가 메신저에 들어왔다.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라고,,
고모부가 오늘 못넘길것 같다고, 다들 병원에서 있었다고.
그런데 괜찮아지셔서 집에 왔다고.
괜찮으면 내일 울산에 오지 않겠냐고 했다.
며칠 안남으신거 같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싶었다.

잠을 자면 못일어나 울산에 못갈것 같았다. 그래서 밤을 샜다. 그리고 첫차를 타고 울산으로 내려갔다.
보름 남짓 지났을 뿐인데, 그사이 고모부는 너무 안좋아지셨고,
뇌에까지 전이가 되 사람도 잘 못알아 보실정도였다.
다행인건지, 내가 찾아간 날은 좀 괜찮으셨던 것 같다.
고모부~ 저 왔어요. 하고 불렀더니, 나를 알아보셨다.
혀가 말려들어가 제대로 말을 못하셨지만, 머하러 왔냐고 하셨다.
그리고 나를 보고 가만 웃어주셨다.
울음밖에 나지 않았다.
서울로 나서야 될 시간이 되서 저 가요. 라고 인사를 했더니,
조심해서 가라고,
못 가고 가만 서있는 나를 보고 얼른 가라고 하셨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다음날 17일 오전 9시. 고모부는 그렇게 멀리 가셨다..
평생을 배려만 하시더니,
돌아가시는 시간까지 고모부 본인한테는 안좋은, 자식들에게 좋은 시간에 가셨단다.
그런 분이셨다. 마지막까지 고모부는 고모부다우셨는지도 모르겠다.

화장을 하셨다. 화장하는 시간이 한시간 조금 넘게밖에 걸리지 않았다.
남은 뼛조각들이 나왔는데, 그 자리에 틀니의 고정철이 남아있었다.
이제 고모부가 안계신다는게 조금은 실감이 났다.
들어갈때는 여섯명이 옮겼는데,
장지로 가는 길은 오빠 한명이 들면 충분해졌다.

허망하다는 것.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새삼 느꼈다.
장지까지 따라가고 싶었지만, 고향에다 모신다고 해 장지까지는 가지 못했다.

고모부는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아빠의 모습이셨다고 언니에게 얘기를 했더니,
언니도 마찬가지였단다. 언니들, 오빠가 늘 부러웠단다.
울 아버지 보내는 것 같이 아프다고-
고모부는 우리에게 있어 그냥 보통의 고모부가 아니셨다.
아빠 같았고, 아빠였으면 했고, 아빠만큼 따랐다.

지금도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다.
고모집으로 찾아가면 웃으면서 반겨주실 것만 같다.
그래도 부디, 아프지 않는 곳에서 편히 계시면서 우릴 지켜봐주시길 바란다.
오늘따라 무척이나 보고싶다.

2010/05/29 18:09 2010/05/29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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