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 2010/06/21 00:31

한글의 다양한 어휘를 마음껏 느낄 수있는게 가장 큰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소설을 좋아해야 함이 맞는데, 난 그러지 못하다.
어둡고 무거운 시대가 반영된 책들이 많다보니, 문체도 무겁고, 일단 내 지식이 짧아 이해하기에 어렵기도 하고 뭐 이런 저런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국내 작가의 책을 볼 때 다양한 표현들을 발견하면 숨어있던 감성들이 자극받을 때가 있다.
난 82년 생이다.
그래서 나는 그 숨막히는 그 시대를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보냈는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그 마음들.
그때의 그 마음들을, 그리고 그들을 백퍼센트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서일까-
왈칵 눈물을 쏟지는 않았다.
조금은 담담하게, 조금은 애절하고, 또 조금은 쓸쓸한 마음이 들었을 뿐...
그리고 조금의 눈물이 찔끔- 났을 뿐..
청춘. 젊음은 시대가 달라져도 각자가 느끼는 무게감, 상실감, 부재는 그때나 지금이나,
느끼고 받아들이는 깊이는 많은 차이가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왠지, 괜찮다고.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우리말로 씌어진 아름답고 품격 있는 청춘소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리고 활활 타오르는 열정적인 청춘은 아니지만, 담담하고 천천히 흘러가는 청춘을 얘기해준다.
마음에 드는 청춘소설이다고 생각했다.
위로가 필요한 그 누군가에게 추천해 주고 싶은 책-
P.10
의문과 슬픔을 품은 채 나를 무작정 걷게 하던 그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쓰라린 마음들은. 혼자 있을 때면 창을 든 사냥꾼처럼 내 마음을 들쑤셔대던 아픔들은 어디로 스며들고 버려졌기에 나는 이렇게 견딜 만해졌을까. 이것이 인생인가. 시간이 쉬지 않고 흐른다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스러운 것은 이 때문인가. 소용돌이치는 물살에 휘말려 헤어나올 길 없는 것 같았을 때 지금은 잊은 그 누군가 해줬던 말. 지금이 지나면 또다른 시간이 온다고 했던 그말은 이렇게 증명되기도 하나보다. 이 순간이 지나간다는 것은 가장 큰 고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에게나 지금 충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이게네가 모두 적절한 말이다. 어떤 이에게는 견딜 힘을 주고, 어떤 이에게는 겸손할 힘을 줄테니까.
P.22
잊고 살아도, 만나지 못하고 살아도, 우리가 한순간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이 서글프기도 했다.
P.77
왜 하필 서른셋이냐고 묻고 싶은 모양이군. 글쎄 서른셋은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돌아간 나이고 알렉산더가 거대 제국을 건설하고 죽은 나이지. 서른셋이 지나면 더이상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을까. 요절이란 말도 서른셋이 되기 전 죽은 자들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니겠나. 예술가들에겐 요절은 때로 영광이지. 그들의 작품이나 저작은 내게 연민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어.
P.110
그가 숨을 들이쉬거나 내쉴 때마다 내 가슴에 배에 느껴지는 긴장에 집중되었다. 그 긴장은 바다를 처음 봤을 때, 겨울밤을 보낸 신새벽에 마당에 눈이 하얗게 쌓인 것을 발견했을 때, 생기를 잃고 말라비틀어져 있던 포도덩굴에 봄기운이 퍼져 새순이 파릇하게 올라오는 게 믿지기 않아 손톱으로 덩굴을 긁어보았을 때, 어린애의 분홍 손톱을 들여다볼 때와 같이 싸한 기쁨을 동반하고 있었다. 여름이 지나가는 하늘에서 흰 뭉게구름을 보게 되었을 때나 달콤한 복숭아 껍질을 벗기다가 한입 베어물었을 때나 산길을 가다가 무심히 주운 잣방울 속에 꽉 들어찬 흰잣들을 보게 되었을 때와 같은.
P.155
그.때.의.그.기.쁨.만.큼, 이라는 말이 나의 마음 속에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P.157
그.때.의.그.절.망.만.큼, 이라는 그의 목소리가 물처럼 스며들어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기쁨이지만은 않을까. 왜 슬픔이고 절망이기도 할까.
P.195
우리 엄마는 나에게 누군가 미워지면 그 사람이 자는 모습을 보라고 했어. 하루를 보내고 자는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라고. 자는 모습을 보면 누구도 미워할 수 없게 된다고. 나는 화가 나거나 힘겨우면 일단 한숨 자는걸. 자고 나면 좀 누그러져 있지 않아? 사람은 자면서 새로 태어난다고 생각해봐.
P.266
이 세상의 어딘가에 들어가지 말라는 금지 표시가 있는 곳은 꼭 들어봐야겠네, 생각했어. 경회루 주변을 수차례 배회하면서도, 그 앞 나무의자에 앉아서 경회루를 바라보면서도 이층으로 오르는 나무계단을 그냥 지나쳤던 것은 올라가지 말라는 표지를 미리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테지.
P.291
우리는 지금 기고 어두운 강을 건너는 중입니다.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누르고 강물이 목 위로 차올라 가라앉아버리고 싶을 때마다 생각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짊어진 무게만큼 그만한 구게의 세계를 우리가 발로 딛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불행이도 지상의 인간은 가볍게 이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해방되어 비상하듯 살 수는 없습닌다. 인생은 매순간 우리에게 힘든 결단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의 허공을 지나는 것이 아니라 무게와 부피와 질감을 지닌 실존하는 것들의 관계망을 지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이 끝없이 변하는 한 우리의 희망도 사그라들지 않을 겁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P.341
인간은 불완전해. 어떤 명언이나 교훈으로도 딱 떨어지지 않는 복잡한 존재지. 그때 나는 뭘 했던가? 하는 자책이 일생 동안 따라다닐걸세, 그림자처럼 말이네. 사랑한 것일수록 더 그럴 거야.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절망할 줄 모르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다만..... 그 절망에 자네들 영혼이 훼손되지 않기만을 바라네.
P.344
젊은이들이 오로지 사랑스럽게만 보일 때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나이를 먹는 게 나쁘지 않다. 청춘을 통화해내고 있는 젊은이들을 향한 은근한 부러움, 눈을 비비고 있어도 빛이 나는 그들을 향해 물결처럼 퍼지던 상실감이 가라앉고 오로지 그들이 무엇에도 압박받지 않고 자유롭게 앞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기만을 바라게 되는 것도 나이를 먹는 일에 속하니까.
P.347
태어나서 살고 죽는 사이에 가장 찬란한 순간, 인간이거나 미미한 사물이거나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겐 그런 순간이 있다.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르는 그런 순간이.
P.354
나의 크리스토프들, 함께해주어 고마웠네. 슬퍼하지 말게. 모든 것엔 끝이 찾아오지. 젊음도 고통도 열정도 공허도 전쟁도 폭력도. 꽃이 피면 지지 않나. 나도 발생했으니 소멸하는 것이네. 하늘을 올려다보게. 거기엔 별이 있어. 별은 우리가 바라볼 때도 잊고 있을 때도 죽은 뒤에도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을걸세. 한 사람 한 사람 이 세상의 단 하나의 별빛들이 되게, 가 되었다.
P.358
어떤 시간을 두고 오래전, 이라고 말하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오래전, 이라고 쓸 수 있을 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게 되는 것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그.쪽.으.로.갈.까
내.가.그.쪽.으.로.갈.께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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